그렇다고 악플을 달라는건 아닙니다 윤키호테(YunQuixote)와의 이음 ::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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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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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story Birthday


2011. 4. 16. 22:55 ☆ 인물



찰스 스펜서 채플린 경(Sir Charles Spencer Chaplin, KBE, 1889년 4월 16일~1977년 12월 25일[1])은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 출신의 희극 배우 · 영화 감독 · 영화 제작자이다.



아돌프 히틀러와 유사한 얼굴과 체격으로 유명하며, 나이도 동갑이었는데 다만 채플린이 히틀러보다 4일 일찍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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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그가 만든 <어깨총>, <모던 타임즈>, <시티 라이트>, <위대한 독재자> 등은 그의 업적을 말하였으며 끊임없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를 뛰어난 감독이자 제작, 배우, 음악 감독으로 만들었다.
채플린은 <무슈 베르두>로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란 오명을 얻었고 결국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비판한 <뉴욕의 왕>을 내놓았다.



 채플린은 둥근 챙모자에 꽉끼는 웃도리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짧은 지팡이를 든 그의 전형적 모습을 선보였다. 채플린은 훗날 자서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난 정말이지 뭘 어떻게 해야 코메디 답게 보일 수 있을지 몰랐다. 어찌되었든 지난 번 영화 《살리기》 같은 모양새여서는 안 될 것이기에 모든 것을 한 번 뒤집어 보기로 했다. 작은 모자에 꽉끼는 웃도리를 입고 헐렁한 바지를 준비했다. 거기에 큼직한 구두를 신고 맥 세넷에게 보여주었다. 세넷은 좀 더 나이든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는 작은 콧수염을 붙였다. 콧수염은 내 원래의 표정을 바꾸지 않고 나이들어 보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난 이 캐릭터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막상 분장을 마치자 나는 그 케릭터가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무대에 오르자 캐릭터가 완전히 태어나게 되었다. ” — 찰리 채플린, 1964년,

당시 둥근챙의 더비 모자와 바지는 채플린의 장인이었던 희극 배우 "뚱보" 알버클의 것이었다. 거기에 동료 희극배우 채스터 콘킨이 꽉끼는 웃옷을 구해주었고, 싸이즈의 구두는 동료 희극 배우인 포드 스텔링이 준 것이었다. 채플린은 구두의 좌우를 바꾸어 신었다. 콧수염은 희극 배우 맥 스웨인의 머리카락을 잘라 붙였다. 채플린이 스스로 구한 것은 작달막한 지팡이뿐이었다.

1914년부터 1953년까지 채플린의 미국 생활은 성공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광신적인 반공주의를 뜻하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시작되자 채플린 역시 이를 비켜가지 못했다. 채플린은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소환되었다. FBI의 존 에드거 후버는 채플린의 혐의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전쟁 중 언행을 샅샅히 뒤져 문제삼았다.
1952년 채플린은 《라임라이트》를 홍보하기 위해 런던에 갔다. 후버는 이 때에 맞춰 미국 이민심사국에 채플린의 귀국을 거절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이 요청으로 인해 채플린은 미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전쟁 이후 이런 선동이 횡행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들은 미국 황색언론의 선동을 근거로 나에 대한 중상모략을 일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이상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수는 없다. 나는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다. ”— 채플린, 1953년
채플린은 스위스 브베이에 정착하였다. 이후 채플린이 미국에 입국한 것은 1972년 아카데미 명예상을 수상하기 위한 방문이 유일하다.
 
 채플린은 1977년 크리스마스에 스위스 브베이에서 사망하였다.(89세)
posted by 윤키호테 윤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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