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악플을 달라는건 아닙니다 윤키호테(YunQuixote)와의 이음 :: 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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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son d'être, wanna Be Hayabusa, Recontextualis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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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20. 19:15 ※ 서적







작품 감상의 분류

"아주 거칠게 분류하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는 크게 네 가지 수준이 있는 듯하다.
관객은 작품으로 부터
정서적(Emotional) 감동을 받거나,
지각적(Perceptual) 쾌감을 얻거나,
지성적(Intellectual) 자극을 받거나,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영성의(Spiritual) 울림을 얻기도 한다." -p. 15

> 진교수님이 이 네가지를 나름의 위계를 통하여 나열한듯하다.
절대적인 위계는 아닐 것이다. 작품에 따라 전시장 분위기에 따라 관객의 기분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정서 지각 지성의 수순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다. 인간의 발달과정과도 닮아있다.
문제는 영성인데, 난 마크 로스코의 후기작품에서 나를 붙잡고 크게 뒤흔드는 것 같은 강한 울림을 얻었었다. 
미술작품에 대한 큰 관심과 지식도 없었고, 마크 로스코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의 작품들을 쭉 둘러보면서 그를 알아가고, 나를 못떠나게 발목을 붙잡은 작품이 따뜻하고 희망적인 그의 후기 작품들이다. 
이런 울림을 또 받을수 있을까?
현재의 내 수준은 정서와 지각 사이 쯤에서 감상하고 있는듯 한데, 꾸준히 관심과 노력을 들이면 진교수가 누리는 지성적 감상까지 도달할 수는 있으리라 본다.
문제는 영성이다. 이건 관심과 노력으로 다시금 누릴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도 일단 해봐야지.






20120908 경향신문 "[진중권의 현대미술 이야기](1)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흘리기(Dripping)작업하는 모습

No chaos. Damn it.


누군가의 작품이 내 작품이 되는 순간

"작품의 수용은 그저 작품이 던지는 물음에 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의미의 감상은 작품을 통해 누구도 던지지 않았던 새로운 물음들을 생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하는 능력, 의제를 처음으로 '설정'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 P.17

수동과 능동 끌려가는 것과 끌고가는 것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감상도 두 관점에서 보게된다. 
누구나 던지는, 던졌던 작품에 대한 질문들 
작품의 작가는? 작품명은? 완성된 연도는? 사용된 기법은? 등은 흔함속에서 가치 찾기란 쉽지가 않듯, 단순히 편하고 쉽고 간단해서 작품 이해도에 대한 도구의 일부분으로서 던지는 이러한 질문과 답은 그리 중요치 않다고 본다.
이미 생각된 질문들이기에 그 답을 찾는데 있어서, 네이버 지식즐이나 구글링을 사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쉽게 들어온 정보는 쉽게 나간다고 생각하기에 미련해도 남이 해논게 아닌 주체적으로 던지고 찾아가는게 중요하다고 보고, 질문을 어떻게 던졌냐에 따라 답 찾아가는 길도 일정부분 결정이 되어진다 생각된다.

아무리 문제를 잘 푸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문제를 내는 문제를 잘 풀어 낼지는 의구심이 간다.
문제를 제 맘대로 요리하고 가지고 논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그 문제가 있을 때의 얘기이다.
문제에 대한 답은 언젠가는 나올지 영원히 풀어야 할 숙제일지 모르나, 질문으로 던져지기 전까지의 문제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남들이 갔던 길을 가는건 분명 함께가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도 않고, 효율적이고 쉽고 편하고 간단하지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은 누군가가 따라와 줄지 따라오면 언제 따라올지 모르는 외로움과 불안감, 어렵고 불편하고 복잡한 비효율적인 바보같은 그 길은 내 길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은 감상에서도 묻어나지 않을까?

왜를 까지말고, 왜를 던지자.





작품은 물건이 아니라 생물이다.

"작품은 제작된 순간에 완성되는 죽은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는 물음과 답변의 놀이를 통해 영원히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생물'이다." - p.18

끝없는 물음과 답변을 통한 사색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고전의 가치는 이런대서 나오는게 아닌가 싶다. 시간이 지나도 끝임없이 질문을 던져준다.
그래서 계속 회자되고 가치가 지속된다.
작품 속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생각을 들였느냐에 따라 작품의 가치는 더욱 오래오래 지속될 것이다.

써논걸 다시 보니 사색도 정리도 엉망이다.

Lv7. 벌레님의 되는데요. .
군생활하면서 해봤던 24인텐트 혼자 치기가 자의든 타의든 명확히 가를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놀이로 진행이 된 점.
그리고 실질적인 경험에서 우러나는 짧지만 강렬한 "되는데요. ." 이 한마디가 참 대단해 보인다.
더 대단한건 예전엔 됬지만 지금은 안될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해냈다는게 더 대단한다.
그런 위험을 어느정도 예상하고 2시간으로 잡고 진행했는지도 모르겠지만...




해석에 대한 관념을 과학에서 예술로

"과학으로서 해석이 폐쇄적이라면, 문학으로서 해석은 개방적이다. 
즉 전자가 보편적 구속력이 있는 정답으로 작품을 둘러싼 담론의 놀이에 종지부를 찍으려 한다면, 후자는 수용자의 개별적 체험에 기초하여 작품에 대한 담론의 놀이를 무한히 영속화하려 한다. 
과학으로서 해석이 순수주의를 지향한다면, 문학으로서 해석은 혼합주의를 용인한다.
전자가 상이한 해석들 사이의 모순을 제거하려 한다면, 후자는 다양한 해석 사이의 모순성을 허용한다." -p.21
> 앞 부분의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연장선상으로 봐도 무방할듯하다. 헌데 문학이라는 단어가 해석에 따라 이해하고 넘어갈 수는 있겠지만 매끄럽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과학에 대해선 크게 아는게 없어서 상대적으로 위 글에서 말하는 문학으로 치우쳐 이해했는지도 모르겠다.
순수주의를 지향한다에서의 순수주의는 진리로 바꿔 이해해도 될라나?

요즘에 기사나 리뷰로 자주 보게되는 마르크스의 자본같은 경우도 사회과학으로 보고 획일된 해석으로 몰고가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다양한 해석은 존중받아야 마땅하고, 그런 해석이 있기에 계속해서 회자되고 작품의 생명력이 유지되기는 하나, 작가의 주장과 해석자의 주장을 교묘하게 뒤섞어서 해석자의 주장이 곧 작가의 주장인냥 글로 엮어내는 것은 아니라 본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신체는 세계를 입에 넣고, 삼키어, 쪼개어 제 안에 섭취한다.
신체는 그것을 대가로 몸집을 불리며 성장한다.
벌린 채 물어뜯고 씹어대는 입 속에서 벌어지는 책과 인간의 만남. 
인간의 사유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제재, 가장 오래된 모티프 중 하나이다.
여기서 인간은 세계를 경험하고, 그 맛을 느끼며, 그것능 받아들여 자신의 일부로 만든다." -p.60

> 성체성사처럼 입에 넣는다는 행동은 성스러운 의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입에 댄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버린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식당에서의 인증샷이나, 사진전시회의 사진들을 사진으로만 후다닥 찍고 나가는 것 같은... 얼마전 속초에 갔을때, 사진찍는게 목적으로 온거면 더 말을 붙일 필요가 없겠지만, 바다에 발도 담가보지 않고 펜션 테라스에서 주구장창 사진만 찍던 사람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작년 정보사회론 시간에 나온 누군가의 한마디처럼 수박의 겉만 핧는 것이 아닌, 에피타이져만 먹고 끝내는게 아닌, 여행을 책만으로만 하는게 아닌 어제 중간부터 봐서 조금 아쉬웠던 KBS1 수요기획 김기덕 감독처럼 수박의 속내를 수저로 퍼서 입에 넣고, 씹고 음미하여 완전히 몸에 흡수 시켜야 할 것이다.
이게 체득인가?!
몸에 흡수하는데 관여하게되는 치아나 혀, 목과 오장육부등 신체기관은 어떻게 연결지어봐야 될까?!

그리고 덧붙여 미각혐오학습(Taste Aversion Learning)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학습은 기본적으로 반복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는데,
입에 넣는 것에 있어서 만큼은 생존에 직결되는 중요한 것이라 그런지 단 한번의 경험과 학습으로도 트라우마 같은게 생겨 다신 입에 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술먹고 꽐라가 되서 죽을 고생을 하고, 커피와 담배 그리고 적당한 숙성을 통한 입에서의 시궁창 스멜과 같은 충분히 혐오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도 끊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진교수님의 감상? 해석?론에 대한 내용은 머릿말 부분에서 끝이 나고 그 다음부터는 진교수님이 어떤식으로 작품들을 지적측면에서 읽고 해석하시는지 그 과정들이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들을 위주로 죽 나온다.

독일문화와 예술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감상이 뭔가에 대해 고민을 하며 내 나름의 감상법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있다. 삼단 감상법이라 명명해본 이 방법은 일단, 작가나 작품이나 기타 아무것도 모른채 일단 다가가서 작품을 감상한다. 그리고 작가와 작품에 대한 설명이나 자료등을 본다거나 도슨트를 이용 후 두번째 감상을 하고, 첫번째와 두번째 감상의 차이와 달랏던 점을 비교 분석하며 세번째 감상을 하는 것이다.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알았던건 아니지만, 이게 최선의 감상, 해석법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감상과 해석만이 아닌 내가 직접 그려본다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현재로선 나름의 최선의 선택으로
KIAF라는 뷔페에 가서 각양각색의 작품들을 맘껏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봐야겠다. 

물론 감상과 해석은 주체적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게







Boy with a Drawing - Giovanni Francesco Caroto

그림을 든 빨간 머리 소년 - 조반니 프란체스카 카로토, 1515년 경


아이를 교육한다는 것

"로저 프라이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teaching)'과 '교육하는 것(educating)'을 구별한다.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사용하는 기법을 '가르치는 것'은 과거의 관습으로 아이의 창의성을 망칠 뿐이다. 
가르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타고난 예술가이다. 
따라서 선생은 아이들이 타고난 재능을 자연스레 펼치도록 옆에서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p.132
> 요즘 학교폭력 가해자 캠프에서 활동하면서 애들에게 많이 배운다. 애들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그른것이었지 애들이 나쁜건 아니라 본다.
애들이 그렇게 커간건 주변의 어른들과 사회적 환경의 문제이지, 태어날 때부터 그른 아이로 태어나지는 않았을테니까, 그른 아이로 만든거지

왜에 대한 이유적인 문제는 함께 고민해 보고 찾아 볼 수 있다. 이유야 만들려치면 무궁무진하니까, 중요한건 어떻게에 대한 방법적인 문제라 보는데, 선례를 통한 성공적인 방법들을 다양한 통로로 학습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결국 홀로 풀어야할 혼자만의 숙제가 아닐까 모르겠다.

필리핀 속담에 "하기 싫은 일은 이유를 찾고, 하고 싶은 일은 방법을 찾는다."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과 함께 방법들을 찾다보면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이 생길까?
아이들에게 필요한건 무언가에도 의지하지 않는 주체적이고도, 자기 기준에 맞춰 판단할 줄알고, 자신의 기준에 의해 한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질 줄 알게하는게 아닐까?

~해라 라고 하는 애길 자주 듣는거 보단, 
~할래요라고 애들이 자주 말하는걸 듣고 싶다.
축구, 담배, 휴대폰빼고...

하늘의 별보다 더 빛나는 "지상의 별처럼"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특별하다.

2012/12/28 - [▶ 영상/영화] - 2007, 지상의 별처럼 (Like Stars on Earth)


"아이 스케치북에 손대지 마라"

2012/11/02 - [※ 서적] - 아이 스케치북에 손대지 마라 - 김미영




신중함의 알레고리 Allegory of Time Governed by Prudence, 티치아노 베첼리 Tiziano Vecelli



신중함 Prudenza

"과거(의 경험)에서 배워, 현재에 신중하게 행동하여, 미래를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Ex praeterito, praesens prudenter agit, ne futura actione deturpet.)

- 성서도덕사전, 페트루스 베르코리우스
Repertorium Morale, Petrus Berchorious
중략
이 책에 '신중함' 은 "과거의 기억, 현재의 관리, 미래의 관조로 이루어진다."고 기술되어 있다. -p.187

> 과거 : 현재 : 미래 = 3 : 5 : 2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를 참고하여 미래를 만들어 가자.

프로이트의 성격의 구조에 나오는
원초아, 자아, 초자아
Es, Ich, Über Ich
Id, Ego, Super Ego
를 보면 현재의 내 모습이 자아, 이상적인 내 모습이 초자아, 본능적인 원초아 이런식으로 내 멋대로 분류해 기억했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비율은 3:5:2이지만, 나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3:3:4라고 안심시켜보고, 때에 따라선 3:2:5의 이상주의자로 느껴지기도 한다. 

개개인이 어떻게 살지는 각자 판단할 문제이고, 정답은 없다. 
오늘만 사는 사람도, 표리부동한 사람도, 미친듯사는 사람도 내가 간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 권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해서 남에게 강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내 생각만 하고 살자는건 아니다. 내가 아닌 타자에게 내 행동이나 의향이 향할때, 혼자의 책임으로 온전히 처리할 수는 없기에 신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중함(Prudenza)=기억(Memory), 지성(Intelligence), 예지(Foresight)

레테의 강물을 얼마나 퍼마시고 다녓는지 끊임없이 괴롭히는 망각때문에 메모를 달고 사는 버릇이 생겻다. 메모를 하기 시작하니 나중에 그걸 보면 되지 하는 안일한 생각도 생겨나서, 이제는 나중에 다시 보기 위한 메모라기 보단 최대한 긍정적인 기억으로 많이 남기기 위한 복기이자 초록으로 필사하려 노력중에 있다.

현명하지도 못하고, 똑똑하지도 않지만, 아무리 못해도 똑똑해지려 노력은 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노력하는 것뿐이다."라는 문구가 참 좋다.







힘이 없으면, 문화도 없다.

"사자의 머리는 현재를 가르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일어나는 행동이어서 강력하고 강렬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늑대의 머리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과거에 속하는 메모리는 먹어치워져 사라지기 때문이다.
주인을 기쁘게 하려는 개의 머리는 미래에 벌어질 일을 가르킨다. 그것에 대한 희망은 비록 불확실하긴 하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p.192

> 앞에 노년 중년 청년에 이은 과거 현재 미래의
비유가 늑대 사자 개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전의 그림 신중함의 알레고리와 연결지어 위의 인간의 형상과 아래 동물의 형상을 분리시켜 해석을 하기 시작한다. 

"이집트의 동물 신이 졸지에 헬레니즘(그리스) 인간 신의 애완동물로 전락한 셈이다."
신도 종교도 예술도 문화도 결국 힘의 지배를 받는 것인가?!
힘 없이는 소리없는 아우성이 되는건가?

힘이 없으면 문화도 없다는 제목은 힘을 가지면 문화도 가진다는 말과 상통할 수 있다고 본다.
그걸 요즘 처참히 당하고 있으면서도 깨닳지 못하는거 같다.

"모든 것은 해석의 지배를 받는다. 당대를 지배하는 해석은 힘의 함수이지, 진실의 함수가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감기때문에 머리가 띵해서 그런지 잘 돌아가지가 않아 남 얘기만 나열하고 만다.
힘이 없으면 내 얘기를 못할뿐더라 안하게 되는구나





개 El Perro -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작가와 작품

"작가의 전기에 대한 지식은 물론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하지만 작가를 이해했다고 곧 작품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p.264

> 이 작품을 고야가 그린건지, 고야의 아들이 별장가격을 높이기 위해 그린건지, 도상학적, 전기적, 인간주의적, 실존주의적 어떤 해석이든 간에 해석은 해석자의 성향이 뭍어 난다고 본다. 어쩌겠나 말이 없는 그림속 개는 하늘만 멍하니 올려다 볼 뿐이지.

작가와 작품을 표기할때 나는 되도록이면, 무엇이 주가 되는지에 맞춰서 쓰려 노력한다.
작품에 대한 얘기를 쓸때는 작품명이 먼저 오고 작가명이 뒤에 오고, 작가의 작품들을 얘기할 때는 작가를 위에 혹은 앞에 쓰고 작품들을 나열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종종 귀찮음에 안일한 생각이 든다.
'작가랑 작품명이 바뀌었다고 말하고자 하는 그것이 바뀌나? 뭐 어때 의사 전달만 잘하면 됬지.'하는 생각들. 이런 부분들에 있어서는 나름의 고집이 무지 쎈거 같다.
왜 저러고 사나, 저렇게 유도리 없이 어찌 살아가려하나..
유도리는 인간에게 향해야지 인간이 아닌 다른 것에 향하는건 쉽고 편하고 간단하게 뭔가를 하기위한 이기적인 자기 합리화라는 생각이다.

트위터에서 보는 진교수는 투견장의 도사견같다.
군에서 읽었던 미오 속의 미학자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이번 교수대 위의 까치에서의 진중권은 평범한 미학전공한 일개의 사람으로 편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크다. 진교수는 츤데레
문화 예술 미술 입문서로 괜찮은 책이다.



교수대 위의 까치
국내도서>예술/대중문화
저자 : 진중권(JUNGKWON CHIN)
출판 : 휴머니스트 200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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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키호테 윤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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